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2014년 4월 나에게는 조금 불편했던 신사동 생활을 정리하고 필리핀의 앙겔레스로 떠나게 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음에도 이상하게 필리핀과는 인연이 없었다. 유튜브나 남들에게 필리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인지
익숙하게만 여겨졌던 새벽 2시의 앙헬레스의 첫 인상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렸을 때 덥고 습한 아열대 공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직 쌀쌀했던 4월의 서울 날씨 때문에
막 도착한 곳의 날씨 차이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그날 밤 모든 풍경과 피부를 스4치는 눅눅한 바람까지
클락 공항의 인상은 없어지지 앟는 얼룩처럼 지금까지 남아있다.
위압적인 필리핀 세관 공무원들의 몇 차례나 반복되는 짐 검사 끝에 후배가 접힌 달러를 세관 직원에게 찔러
주고 나서야 공항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몇 년 전 캄보디아에 입국할 때, 무표정하고 당당하게 5 달라를
표시하는 손가락 5개를 펴 보이던 입국 심사 직원이 생각났다. 빈곤한 국가에서 공항 근무란 최고의 백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그들에게 돈 있는 외국 관광객은 그냥 봉이었다.
마중 나온 지인을 만나, 차를 타고 약 5분동안 달려 도착한 곳이 앙헬레스의 코리아 타운이었다. 해운대 식당에
들어가니 새벽 3시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말은 횟집이었지만 메뉴에는 된장찌게에서 김밥, 떡볶이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이렇게 앙헬레스 라틴 발음으로는 앙겔레스라고 부르는 곳에서 반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클락 게이트 근처에 위치한 코리아 타운은 도로 입구에 서있는 경계석이 없어도 이곳이 코리아 타운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종로약국, 낙원떡집, 24시사우나, 서울 삼겹살 등 한국 상점들이 1 Km 정도, 거리에 몰려 있었다.
큰 길 안쪽으로도 중화 요리집, 칼국수 집 그리고 한국 반찬, 식품 등 한국 제품만 파는 K 마트가 3 개쯤 있어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앙헬레스는 자그마한 도시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2시간 떨어진 곳으로 예전에 클락 미군기지가 주둔하여서
클락과는 담 하나 사이로 구분돼 있다. 1986년 민주 정권이 들어서며, 반미 시위와 함께 미군 철수 요구가 점점
강해지던 시기에 1991년 클락 공군 기지 인근에 있던 피나투보 화산이 엄청난 규모로 폭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공군은 철수하였고, 그래서 클락은 그때의 부대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예전에 용산 미군 기지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미군 부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클락에는 고급 호텔과 골프장,
카지노들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머무는 지역이어서 나무와 잔디로 깨끗하게 정돈되었지만, 담 하나만 건너면
검은 매연과 함께 현란한 모양의 지프니와 택시를 대신하는 트라이시클이 복잡한 도로를 운행하는, 앙헬레스
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던 술집들이 워킹 스트리트 지역에 모여있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예전 동두천에는
미군들을 상대하던 술집들이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앙헬레스의 유명한 “워킹 스트리트”는 대략
1Km 거리 양쪽으로 술집들이 늘어있어 밤새도록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야한 옷차림으로 손님을 유혹하는
아가씨들로 정신이 없다.

지금은 택시가 운행한다 하는데 당시 앙헬레스는 트라이시쿨 기사들이 시위를 해서 택시를 이용 할 수 없었다.
오토바이 뒷 부분에 보조석을 덧 붙여, 만든 트라이시클은 타기전에 요금을 흥정해야 했는데, 한국인이 타려면
어김없이 터무니 없는 요금을 부른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이동할 때마다 안되는 영어로 흥정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지프니를 주로 이용했다. 한달 살아보니 동네가 작아, 거기가 거기라 지프니로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서민들의 교통 수단이자 차의 겉모습도 화려하게 페인트로 치장하여, 필리핀하면 지프니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군이 두고 간 군용 트럭를 개조해서 만든 차라, 어쩌다 뒤쪽에 앉게 되면 매연 때문에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어야만 했다. 정거장은 없고 길에서 손님이 손들면 태우고 손님이 내린다고 소리치면 아무 데나 내려주었다.
요금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운전기사에게 건네주는 관습에서 서민들의 정겨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언젠가, 앞자리 운전석 옆에 않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뒤 칸에 만석이라, 앞자리에 한 명을 더 태우려 하였다.
이미 운전사 포함해 3명이 타고 있는데, 운전 기사이자 사장의 욕심 때문에 결국 한 명을 더 태웠다. 앞자리에
4명이나 탓으니, 기사가 편한 자세가 될 수 없었고, 몸의 반 쯤, 문 밖으로 나온 채 운전하는 모습이 기억난다.
그래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한 푼 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것을, 안전 같은 것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 얘기고, 이곳은 이곳 데로의 사정이 있는 것을.

필리핀의 대중 교통수단 지프니
필리핀 화교 재벌이 운영하는 쇼핑몰 체인 SM 몰에는 식당에서 부터 여러 상점들이 있어서 자주 가는 곳인데
이곳에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는데, 5, 6세 쯤 되는 아이들이 구걸하는 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딱한 마음에 잔돈이나 먹을 것이라도 주고 싶지만, 그러면 근처에 있는 꼬맹이들이 함께 몰려와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60년전 한국이 그랬었다. 예전에는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살았던 필리핀은 어쩌다가 지금
이 모양이 되어 버렸는지?
1960년대에 한국의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빠서 그해 국내에서 열기로 했던 아시아 올림픽을 반납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나라가 가난했으면, 세계 올림픽도 아닌, 아시아 올림픽도 열지 못했을까? 국내 유일의 실내 체육관인
장충 체육관도 필리핀이 지워주었단 이야기도 있는데, 다른 나라가 발전할 때 이곳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되 돌아 본다면, 결국은 전체 국민의 의식 수준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패한 정치인들과 선거 때마다 얼마의 푼 돈을 받고, 그들을 용인하는 국민들의 해묵은 관습은 세월이 가도
바뀌지 않고 있다. 50여년전 같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한국에선 적어도 교육 만큼은 정부나 국민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독재도 있었고, 부패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위해선 배워야 한다는 데에는
뜻이 같았다. 물론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한참 뛰어 놀 아이들도 학교에서 창의력을 키우기보다, 여러 학원을
다니면서 지나친 긴장감과 의무감을 갖게 된 부작용도 작지는 않지만, 지금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던 기초가
된 것은 맞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함에도 정신적 여유는 없고, 치열한
경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동네에서 놀고 있는 필리핀의 어린 아이들
1986년 마닐라공항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강력한 정적 이던 아키노의원을 항공기에서 내리자마자 활주로
에서 버젓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필리핀 전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전국에 번졌으며
결국 독재자 마르코스는 부인 이멜다와, 몇 억 불의 지폐 뭉치와 함께 하와이로 도망치고 말았다. 1965년부터
21년 간을 계엄령으로 장기 집권하던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지고, 이후 민주화 정부가 들어섰지만 선거 제도만
민주화 되었지, 서민 경제나 복지는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나비 효과처럼, 멀리 떨어져 있던 당시 군부 정권에 의해 억눌려있던
한국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고, 결국 민주화 시위를 통해 몇 년 후 장춘 체육관에서 뽑던 대통령 선거는 다시
국민들에게 되 돌아 왔고, 이후 지금의 민주 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많은 섬에 국민들이 흩어져서 살고, 아열대 지역이라 겨울을 견디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근성 같은 건
찾아 볼 수 없다. 매해 폭풍으로 인한 자연 재해가 매해 발생하는데도, 이를 방지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세월 동안, 자연환경과 국민들의 역량에 의해 국가의 위상이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 걸 느끼니, 보리밥도
제데로 못 먹고 살았던 한국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념과 지역 갈등이 너무 심하고 남, 북으로 분단 된
현실도 풀어야 할 문제지만, 조상에게 물려받은 똑똑함과 근성은 한국인들에게 축복인 것 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2025년. 가을에 나무
